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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가 택배 상자 안에 들어가 앉아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사준 숨숨집은 거실 구석에서 그대로입니다. 폭신하고 모양도 예쁜데 애쉬는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반면 어제 온 택배 상자는 뜯자마자 차지했습니다.
처음엔 좀 허탈했는데, 알아보고 나서는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애쉬가 고른 건 폭신함이 아니라 사방이 막힌 구조였습니다.
오늘은 그 뒤로 알게 된 고양이 숨숨집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합니다.
고양이 숨숨집, 캣타워와는 다른 축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캣타워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안정감을 느낀다고 하니 그걸로 충분하겠거니 했습니다.
두 물건은 역할이 다릅니다. 캣타워는 보기 위한 자리입니다. 시야를 확보하고 집 안을 살피는 곳입니다. 숨숨집은 안 보이기 위한 자리입니다. 몸을 감추고 아무 자극도 받지 않는 곳입니다.
고양이는 원래 이 둘을 다 씁니다. 높은 데서 관찰하다가 피곤하거나 불안해지면 좁고 막힌 곳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립니다. 그래서 캣타워가 있어도 숨숨집이 따로 필요합니다.
겁이 많거나 예민한 아이일수록 이 자리가 더 필요합니다. 몸을 숨긴 채로 상황을 살필 수 있어야 마음이 놓이기 때문입니다. 애쉬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냉장고 위로 올라간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습니다. 그때 애쉬에게는 숨을 자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양이 상자, 왜 이걸 제일 좋아할까
종이상자가 사랑받는 이유는 몇 가지가 겹칩니다.
사방이 막혀 있습니다. 등 뒤와 옆이 다 가려지면 어디서 뭐가 올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크기가 딱 맞습니다. 몸이 벽에 닿을 정도로 좁은 걸 오히려 편하게 느낍니다. 넓고 푹신한 방석보다 몸에 꽉 끼는 상자를 고르는 이유입니다.
종이가 소리와 온도를 잡아 줍니다. 밖의 소리가 조금 줄고 체온이 안에 머뭅니다.
그러니까 제가 산 숨숨집이 외면당한 건 품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입구가 넓고 안이 헐거웠던 겁니다.
개가 같이 사는 집이라면 특히 중요합니다. 강아지가 코를 들이밀 수 없는 구조여야 아이에게 진짜 은신처가 됩니다. 반이는 이제 나이가 들어 관심을 두지 않지만, 젊었을 때는 애쉬가 들어간 자리마다 따라가 확인하려 들었습니다.
고양이 은신처, 크기와 입구가 전부였습니다
고르실 때 볼 것은 많지 않습니다.
- 크기: 아이가 몸을 웅크렸을 때 딱 맞는 정도입니다. 크면 안 씁니다. 몸을 돌릴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 입구: 좁을수록 좋아하는데, 대신 나갈 길이 하나뿐이면 불안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뒤쪽에 작은 구멍이 하나 더 있는 형태가 무난합니다.
- 재질: 세탁이나 청소가 되는지 보세요. 털과 냄새가 안에 쌓입니다.
- 바닥: 미끄러지지 않아야 들어갈 때 편합니다.
새로 들이셨다면 안에 아이가 쓰던 담요를 깔아 주세요. 자기 냄새가 나야 자기 자리가 됩니다. 저는 애쉬가 자던 방석을 잘라서 넣었습니다. 새것 냄새가 강한 제품이라면 며칠 꺼내 두고 냄새를 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개수도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화장실을 마릿수에 하나 더 두는 것처럼, 숨을 자리도 두 군데 이상 있는 편이 낫습니다. 한 자리가 시끄러워지면 다른 데로 옮겨 갈 수 있어야 하거든요. 굳이 다 살 필요는 없고 상자 하나를 더 두는 것으로도 됩니다.
숨숨집 위치, 창가 아래는 피하세요
놓는 자리가 제품보다 중요했습니다.
기본은 사람 동선에서 비켜나되 집 안이 보이는 곳입니다. 완전히 격리된 방보다는 거실 한쪽 구석처럼 가족의 기척이 느껴지는 자리를 더 잘 씁니다.
높이도 나눠 두시면 좋습니다. 바닥 가까운 자리와 높은 자리를 하나씩 두면 아이가 그날 기분에 따라 고릅니다. 애쉬는 낮에는 창가 쪽 높은 자리를, 밤에는 바닥 상자를 씁니다.
여기서 하나 조심할 게 있습니다. 창가 바로 아래에는 두지 마세요. 숨숨집이 창문으로 올라가는 발판이 됩니다. 저는 방묘창을 알아보면서 캣타워를 창에서 한 뼘 떼어 놨는데, 숨숨집도 같은 기준으로 봐야 했습니다.
손님이 오는 날에는 숨숨집을 미리 조용한 방으로 옮겨 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초인종이 울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아이가 도망칠 곳이 정해져 있으면 훨씬 덜 놀랍니다.
숨어서 안 나올 때, 구분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들어가서 자는 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라고 만든 자리입니다.
다만 평소와 다르게 하루 종일 안 나온다면 이유가 따로 있을 수 있습니다. 손님이 왔거나 이사를 했거나 새 아이가 들어왔다면 대개 시간이 해결합니다. 이럴 때 억지로 꺼내면 그 자리마저 안전하지 않은 곳이 됩니다.
기준은 밥과 화장실입니다. 숨어 지내도 밥을 먹고 화장실을 쓰면 적응 중인 것이고, 그게 멈추면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애쉬가 숨어 있을 때 밥그릇 위치만 확인하고 나머지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새 숨숨집을 안 쓴다고 바로 치우지는 마세요. 낯선 물건이 며칠 놓여 있다가 자기 냄새가 배면 그때부터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사준 숨숨집을 한동안 안 쓴다고 창고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 자리를 옮기고 담요를 넣고 나서야 애쉬가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저는 수의사가 아닙니다
이 글은 애쉬와 8년을 지내며 겪은 일과 그 과정에서 찾아본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수의사도 행동 전문가도 아니라 여기 적은 기준이 모든 아이에게 맞지는 않습니다. 며칠째 숨어서 밥을 거의 먹지 않거나 화장실을 쓰지 않는다면 성격 문제로 보지 마시고 동물병원에서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상자는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지금 저희 집 거실에는 택배 상자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손님이 오면 저게 왜 저기 있느냐고 묻는데, 애쉬 자리라 못 버립니다.
사준 숨숨집도 자리를 옮기고 안에 애쉬 담요를 넣어 두니 요즘은 가끔 들어갑니다. 그래도 첫 번째 선택은 여전히 상자입니다.
돌아보면 저는 애쉬에게 좋아 보이는 걸 사줬지, 애쉬가 무엇을 편하게 느끼는지는 보지 않았습니다. 답은 이미 거실에 놓여 있었는데 저만 몰랐습니다.



